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 파우스티나 (문단 편집) == 뜬소문과 그 진실 == 로마 제국의 역대 아우구스타 중 [[리비아 드루실라]]와 함께, 본인이 하지 않은 일이 살아생전과 사후 뜬소문으로 확정돼 악녀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뜬소문은 거의 대부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 아들 콤모두스의 기행 이후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 동시대 사람으로 콤모두스 시대때 원로원 의원이 된 디오 카시우스는 콤모두스와 [[루킬라]]의 어머니인 그녀가 남편을 전복시키기 위해 지방 총독(아비디우스 카시우스)과 공모한 대가를 피하기 위해 [[통풍]]으로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거짓으로 밝혀진 지 오래돼 설득력이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물론, 대중매체에서는 각색소개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소 파우스티나 생전의 뜬소문을 넘어, 본인의 상상과 자신이 살던 [[콘스탄티누스 왕조]] 이후의 로마 제국에서 돌던 소문에 따라 그녀를 악녀의 대명사이자 음탕함의 상징 같이 묘사했다. 오늘날 파우스티나의 악행으로 잘 알려진 "소 파우스티나가 수많은 정부를 두고, 관계를 맺었다", "[[검투사]]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음탕해, 검투사와 캄파니아 해안에서 나체로 뒹굴다가 콤모두스를 낳았다", "매일 같이 남색을 탐해 원로원 의원, 장군, 무언극 배우들을 유혹했다", "시동생이자 맏사위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꼬셔 불륜을 저질렀다가, 들킬 위기에 처하자 시동생 루키우스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소문들은 죄다 거짓으로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단죄되고 100년이나 넘게 시간이 흐른 뒤 떠돈 것들이라고 한다.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파우스티나가 남편 마르쿠스 몰래 검투사와 통정해 콤모두스를 낳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쿠스 황제는 아내의 넘치는 정욕을 없애고자 점술가들과 상의 후, 아내와 동침 중인 검투사들을 모두 죽이고 파우스티나에게 그들의 피로 목욕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 아내와 식사를 한 원로원 의원들에게 고위직을 하사한 것은 마르쿠스가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언급된 이런 악의적 뜬소문들은 다행히 여러 증거로 거짓말로 취급받고 있다. 당장, 악의적 소문을 마구 적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역시 그 주장이 중구난방이라서 쉽게 검증이 될 정도다. 그렇지만 소 파우스티나는 당대부터 로마 원로원 인사 중 일부에게 미움받을 행동을 해서, 그녀를 미워하고 어떻게라도 흠잡으려고 하는 인사들이 여럿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이유 중 한 가지는 저명한 대웅변가인 대정치가 헤로데스 아티쿠스와의 갈등이다. 파우스티나와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전생부터 원수라고 믿어도 좋을 만큼 원수 관계였다. 아테네 출신의 이 그리스인 대정치가는 전형적인 소피스트로 엄청난 팬을 거느리고 있었고 에너지 넘치는 웅변솜씨로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는데,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티쿠스는 뛰어난 웅변가이자 학자임에도 인간 말종이었다고 평가받았다. 아티쿠스는 자신의 노예, 해방노예들을 짐승처럼 취급하고 욕설을 퍼붓거나 폭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정신지체 장애를 앓고 있는 친아들이 잘못하면 혼내는 것을 넘어 잔혹하게 처벌하고, 대중들 앞에서 친아들의 장애를 조롱했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미래의 두 황제를 제외하곤 늘 혹독했고, 그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면도칼을 목에 대고 죽이겠다고 위협까지 했다. 따라서 그를 좋아하는 대중들이 많고, 그와 파벌을 이룬 그리스, 아나톨리아, 푸닉 출신의 인사들이 많음에도 이 사내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를 혐오할 만큼 미워했다. 그리고 후자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한명이 바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내 소 파우스티나였다. 그녀는 10살 무렵, 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있었을 때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악행과 폭력성을 직접 목격해 충격을 받았었는데, 어느날 미래의 남편이 될 사촌오빠 마르쿠스가 큰 잘못을 하지 않음에도 엄하게 혼나고 뺨을 맞고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아티쿠스를 증오하게 됐다고 한다. 서기 160년경, 아티쿠스가 임신 중인 아내 안니아 레길리아를 죽였다. [[가정폭력]]으로 벌어진 일이었는데, 여러 증거가 드러나 체포 후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임신 8개월이던 아내가 자신에게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하인에게 명을 내려 아내를 마구 패게 해 죽였는데, 이를 본 노예들이 그 사실을 폭로했다. 헌데 아티쿠스는 자신의 훌륭한 명성, 막대한 재물을 총동원하고 로마 각계에 깔린 친구들을 이용해 무죄를 주장하고, 억울하다고 호소해 본인과 명을 받은 하인 모두 교묘하게 무죄로 방면됐다. 반면 아티쿠스는 여러 친구들의 도움과 증거조작으로 풀려나고, 법정에서 사실을 증언한 노예들은 모두 추방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이 벌어진 뒤, 14년이 지난 174년 아티쿠스는 제국 동부에서 세 사람과 공모해 아테네에서 음모를 꾸몄다고 다시 기소된다. 이때 그는 또 다시 무죄로 풀려날 것이라면서 거만하게 행동하면서, 자신이 가정교사로 있으면서 지도한 사람이 마르쿠스 황제라면서 아테네가 아닌 시르미움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주장하고 기어이 황제가 담당하는 재판을 받게 됐다. 하지만 이 계획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내 소 파우스티나 때문에 완전히 어그러졌다. 재판 당시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아들 콤모두스와 함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반란으로 인해 시르미움에 있었다. 그녀는 막내딸 비비아 사비나와 함께 법정에서 이 사내의 변론을 들었는데, 10살 무렵부터 아티쿠스의 난폭함과 잔혹함을 알고 있던 터라 그가 거짓말을 한다며 유죄로 엄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참다 못한 아티쿠스는 "이 노인은 두럽지 않다"며 화를 내면서 스스로 재판 변론을 포기하고 나가 버렸다. 이후 그는 옛 제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그 여자와 조그마한 여자아이 때문에 신세가 망쳤다"며 황제에게 배은망덕하다고 호통까지 쳤다. 그래서 당황한 황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도리어 유죄도 내리지 못하고, 아내의 뜻에 따라 옛 스승에게 1년 추방형을 내리고, 아티쿠스와 공모했다는 노예 3명은 처형했다. 그래서 화가 난 아티쿠스는 제 발로 1년 추방형을 선택해 아테네에 1년간 돌아가지 않았다. 물론, 이 사건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스승을 달래기 위해 그가 스스로 택한 추방형을 높게 평가하더니 손수 편지까지 보내 잘못을 청하고 황궁으로 오면 융숭히 대접해드리겠다고 싹싹 빌었다. 이 사건 이후, 소 파우스티나는 아티쿠스 친구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고 만다. 로마 각계의 그리스어, 웅변술 교육은 아티쿠스와 그 제자들이 꽉 잡고 있었으니 그들이 마음 먹고 씹어댄 소 파우스티나의 이미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자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재림으로 박히게 됐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당사자가 이를 알기도 전에 할랄라에서 지병으로 죽었고, 애처가인 마르쿠스 황제 역시 그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게르만족들과 싸우다가 별세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상황은 소 파우스티나가 아테네로 복귀한 아티쿠스와 그를 따른 그리스, 아나톨리아, 푸닉 출신 제자들에게 기록과 소문으로 악녀의 대명사로 찍힌 시작이 됐다고 한다. 그들은 소 파우스티나에 대한 온갖 악소문을 만들어 씹어댔고, 뒤에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확정되자 이를 2차, 3차 가공해 소 파우스티나를 부도덕하고, 음란하고, 비열한 황후로 묘사해 이를 계속 홍보했다. 다행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높게 평가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에서는 악의적 소문이 걸릴 경우 크게 처벌받은 터라 이 소문은 음지에 잠들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디오 카시우스 등 당대 의원들은 아티쿠스와 그 제자들과 친구이거나 제자인 까닭에 소 파우스티나를 자기들끼리 씹어대고 또 씹었다. 이는 [[카라칼라]] 시대가 되면서 바뀌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카라칼라 시대가 도래하면서 소 파우스티나는 사후에 [[메살리나]] 수준의 악녀로 이미지가 더 나빠지게 된다. 카라칼라는 아티쿠스의 직계 제자의 직계 제자에게 어릴적부터 배워, 소 파우스티나를 무척 미워했다. 애초에 카라칼라라는 인물이 난폭하고 잔혹한데다 아티쿠스 이상으로 노예, 해방노예, 경비병들을 짐승 다루듯 취급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카라칼라는 소 파우스티나를 없어져야 할 존재로 여겨 계속 욕보였고, 그 행동은 로마인들의 기준으로도 지나쳤다. 그래서 후일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제 손으로 죽이고 단독황제가 되자,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 소 파우스티나가 불쌍한 아티쿠스를 탄압했다고 욕하고 그녀를 기린 카파도키아 신전을 더럽히고 조롱했다. 당연한 말인데, 소 파우스티나는 살아생전 소년, 소녀들을 위해 많이 노력해, 이를 보고 환호한 사람은 적었고 많은 이들은 카라칼라의 무식함과 잔혹함에 경악했다. 더욱이 그가 소 파우스티나의 혈육 중 살아있던 코르니키피아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로마에 머물고 있던 파우스티나의 외손자 중 한명인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까지 게타 지지자이자 부도덕한 파우스티나의 혈육이라며 죽여 그 머리를 효수한 일은 카라칼라가 살아생전부터 폭군 중 폭군으로 공인된 이유가 됐다. 이중 카라칼라가 코르니키피아를 죽인 이유는 게타가 죽은 것을 보고 슬퍼했다는 이유 외에도 아티쿠스에게 고통을 준 딸아이가 그녀일 수 있다는 죄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카라칼라가 폭군으로 불리다가 암살됐고, 그 바람에도 소 파우스티나에 대한 로마인들의 생각은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소 파우스티나는 더 심한 굴욕은 피할 수 있었는데, 이후에도 [[율리아 마마이아]] 같은 시리아 여제들이 여러 이유로 그녀를 걸고 넘어져 이미지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물론, 아티쿠스와 그 제자들이 만들어낸 거짓 소문들은 사실로 알려져 20세기 중반까지도 그녀는 계속 욕먹고, 이 뜬소문을 주제로 하는 영화, 사극까지 나와 이미지는 아직도 좋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직도 대중적 이미지가 나쁜 것은 1세기의 황후 [[리비아 드루실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지고 난 이후, 그리스와 푸닉 출신들의 득세가 예전만 못해진 이래 서서히 그 소문 역시 확대 재생산되지는 않았다.[* 물론,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같은 이들은 여전히 소 파우스티나를 부도덕하고 음란한 황후로 묘사하면서 이를 대차게 비난했다.] 그래서 후대 로마 황제 중 일부는 그녀를 메살리나,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마마이아]] 수준의 황후 내지 [[리빌라]] 같은 악랄한 공주 수준이라고 폄하하지 않았다. 그녀가 죽고 100년이 넘게 흐르고, 그녀의 가문인 안토니누스 가문이 완전히 끝난 뒤인 서기 4세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덕후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황제 [[율리아누스]]는 그나마 그녀를 안 좋게 평가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보면, 로마 제국 역사에서 첫 재평가였다. 이때 율리아누스는 , 이런 사정의 원인을 제공한 파우스티나를 "고결하지만 마냥 모범적이지는 않았다"고 평가하면서, 그녀를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간접적으로나마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인 [[리비아 드루실라]] 같은 이미지라고 평했다. [[분류:로마 황후]][[분류:아우구스타]][[분류:176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